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형주 공방전 (문단 편집) ==== 육손의 유비 잔당 처리와 촉의 군사활동 ==== 한편 여몽이 이렇게 형주의 문제에 심혈을 기울일 동안 육손은 남은 유비의 잔당들을 처리한다. 219년 11월 유비의 의도태수 [[번우]]가 의도군을 버리고 달아나니 여러 성의 장리와 만이 군장들이 모두 항복했다. 육손이 금은동의 관인을 청하여 이제 막 귀부한 이들에게 임시로 내려주고 병사 3천 명을 장군 [[이이(삼국지)|이이]]에게는 수군을, [[사정(삼국지)|사정]]에게는 보병을 이끌고 험요지를 끊게하고 촉장 [[첨안]](詹晏)[* 자치통감에는 담안이라고 되어있다. 그러나 주석에는 첨이 성이라고 기술돼있어 상충한다.], [[진봉]]을 공격하게 해 첨안을 격파하고 진봉을 사로잡는다. 또한 방릉태수 [[등보]], 남향태수 [[곽목]]을 공격해 대파했다.[* 방릉은 임저와 가까운 곳이고 남향군은 관우가 태수를 잡아 복속시킨 지역으로 상용의 동쪽이다. 게다가 방릉은 유봉과 맹달 소유의 상용군 일대이니 상용에서 군사를 내 관우를 구원하려고 했다는 정황증거가 될 수도 있다. 특히 맹달이 유비를 저버리고 위나라에 항복하면서 했던 '형주가 패배하여 괴멸되자, 대신은 통제하지 못해 백의 하나도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신만이 일을 찾아 스스로 방릉(房陵), 상용(上庸)에 이르러 몸을 구걸해 밖에서 자방(自放)했습니다.'라는 말은 맹달은 유봉과 불화하면서 여의치 않은 상황에도 뒤늦게나마 따로 최대한 여력을 내어 등보와 곽목을 보내 관우를 지원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고 변명하는 말일 수도 있다.] 자귀의 대성[* 大姓 명족, 호족]인 [[문포]], [[등개]] 등이 이병[* 夷兵, 이민족 군사] 수천 명을 규합해 서방(촉한)과 서로 연결했지만 육손이 다시 사정을 거느리고 문포, 등개를 치자 문포, 등개가 달아나 촉에서는 그들을 장수로 삼았다. 그 후 육손이 사람을 보내 이들을 유인하자 문포가 무리를 이끌고 돌아와서 항복하는데 이 앞뒤로 참획하고 초항하여 귀부시킨 자가 모두 수만 명을 헤아렸다. 장흠 또한 면수를 장악하며 관우가 수로를 통해 움직이는 것을 차단하며 [[손환]]은 관우의 병사 50명을 잡고 수많은 말과 병기들을 얻었다. 한편 유비는 관우를 구하기 위해서 11월부터 성도에서 구원군을 보내고 장군을 임명하는 등 전선의 상황을 알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 자귀,의도 근처에서 관우의 잔당들을 받아들이고 이들로 하여금 육손을 공격하게 했고 육손은 이를 막았다...로 정리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정황상 유비의 군사활동은 관우가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잡혀 참수될 때까지 이어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촉한의 행적은 관우군이 위험에 빠진 것을 알게 됨(11월 이후)-관우군 잔당을 모아 육손군과 전투를 벌이고 있는 중 관우 사망(12월)으로 정리 될 수 있을 듯하다. 관우의 죽음 역시 즉시 알려졌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